현대유학연구소(소장 최영갑 제25대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철학박사)는 지난 7월25일부터 26일까지 1박 2일 일정으로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화순군 지역의 유교문화유적 답사를 진행했다.
공부자(孔夫子)의 시중지도(時中之道, 때의 상황에 맞는 판단과 행동을 함)의 정신을 계승하여 현대사회에 필요한 유교, 시대 변화에 적합한 유교를 창출함으로써 국민과 함께하고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유교를 연구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된 현대유학연구소의 취지에 공감하는 회원들은 낮 최고기온이 37도에 이를 정도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2026년 폭염대응 종합대책에 따라 신설된 최상위 폭염 경보인 ‘폭염 중대경보’ 발령 사실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가 연거푸 도착하는 가운데 7월25일 토요일 새벽부터 각자의 거주 지역에서 출발하여 첫날 오찬을 시작으로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특히 다른 지역 거주 회원 대다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화순을 방문한 만큼 먼저 지역의 특성 등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유림을 초대하여 개괄적인 설명을 들으며 첫 번째 목적지인 환산정(環山亭)으로 향했다.
1965년 축조된 서성저수지 안에 섬처럼 자리 잡아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정자(亭子)는 음력 1636년 12월8일부터 다음 해인 1637년 1월30일까지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하여 조선의 국왕인 인조(仁祖)가 머물던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무릎 꿇고 앉아 각각 세 번씩 총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려 최대의 공경과 복종을 표하는 청나라의 의례)를 하며 항복했던 사건으로, 우리 민족 최대의 치욕으로 기록되고 있는 병자호란(丙子胡亂)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전의 이괄의 난(1624년) 등에서도 의병을 일으켰던 백천(百泉) 류함(柳涵, 1576-1661) 선생은 ‘북쪽 오랑캐가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와 국왕을 구하기 위해 5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충청도 청주까지 올라갔으나 앞서의 굴욕적인 방법으로 항복했음을 알고 난 후에 통곡하며 돌아와 고향에 방 1칸의 소박한 죽정(竹亭)인 환산정을 짓고 세속을 끊었다.
이후 선생의 뜻을 숭모한 문화 류씨(文化柳氏) 가문과 지역 유림들의 지속적인 관심 속에서 1896년 1차 중건, 1935년 1차 중수(重修), 1958년 보수(補修), 2010년 2차 중수(重修) 등으로 보존을 거듭하며 2025년에는 화순 제11경(景)으로 지정되었고, 건물 안에는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원교(園嶠) 이광사(李匡師, 1702-1777) 선생의 갈필(葛筆) 글씨인 ‘環山亭’ 편액(扁額)이 벽면에 게시되어 있다.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와! 어떻게 이런 곳에 정자를 세웠을까?”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데 원래 건립 당시에는 담장과 이어진 솟을대문도 있었다고 하지만 서성저수지가 만들어지며 주변이 늘어난 물에 의해 잠기면서 담장이 없어지고, 솟을대문도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마치 절에 들어가는 입구에 담장 없이 서 있는 일주문(一柱門)과 같은 독특한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목적지인 김삿갓 종명지는 종명(終命, 목숨을 다함)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매우 생소하여 일반인이라면 쉽게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힘들었겠으나 그동안의 유림활동과 유교문화유적 답사를 통해 비슷한 용례를 접하곤 했던 참석 회원들은 “김삿갓 선생이 여기서 세상을 떠나셨군요?”라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반응이었다.
학창 시절의 국어, 역사 등의 과목에서 언급되곤 했던 김삿갓 선생은 소설이나 이야기 속의 창작 인물로 오해받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1807년에 경기도 양주의 안동 김씨(安東金氏) 가문에서 태어나 실존했던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만큼 원래는 평탄한 삶을 살아야 했으나 5세였던 음력 1811년 12월부터 1812년 4월까지 평안도 지방에서 발생한 홍경래(洪景來)의 난 당시에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 1764-1812)이 적군에게 항복하고, 조정에 거짓 공적을 올린 죄로 참수(斬首)되며 나머지 가족들도 양반 신분을 박탈당한 채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때 아버지 김안근(金安根, 1783-1813)은 수치심으로 고통을 느끼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홀로된 어머니가 자식들을 이끌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김병연은 당시의 또래들처럼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의 첫 단계인 향시(鄕試)에 응시했으나 하필 시제(試題)가 운명의 장난처럼 ‘역적 김익순을 논박하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급제가 목표였기에 출제 의도를 정확하게 맞추는 답안을 내고 돌아왔으나 어머니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이후 4년간 폐인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다가 20살 되던 해부터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전국에 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유랑하였으나 글을 짓는 솜씨가 대단하였기에 가는 곳마다 화제를 만들었고, 그래서인지 지금 읽더라도 어색하지 않고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글을 많이 남겨 ‘김병연’이라는 본명보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한국인의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
35세 때인 1841년부터 화순지역과 인연을 맺은 후에 57세인 1863년 3월 29일에 화순군 동복면 구암마을에서 세상을 떠났고, 3년 후인 1866년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아들 김익균이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김으로써 강원도 영월군은 비운의 국왕인 단종과 화제의 주인공인 김삿갓의 묘가 위치한 고장으로 자리 잡았으며, 묘가 있는 영월군 하동면(下東面)이 지난 2009년 10월 20일부터 김삿갓면으로 명칭을 바꾸며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람 이름을 적용한 행정구역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
이외에도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인해 다수의 인물들이 유배 왔는데 조선의 유학 보급과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다가 절명(絶命)한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선생이 대표적이다.
도학(道學) 정치와 유교의 이상향 구현을 위해 매진하다가 1519년(중종 14) 11월15일 한밤중에 급작스럽게 이뤄진 기묘사화(己卯士禍)의 결과로 국왕 중종(中宗)에게 처음에는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다가 당시 능주(綾州)로 불리던 화순으로 유배되었으나 결국 그해 12월20일에 금부도사가 도착하자 국왕이 계신 한양을 향해 큰절 3배를 올린 뒤 절명시(絶命詩) 한 수를 남기고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으니 당시 나이는 38세였다.
이후 선조(宣祖) 즉위 초에 신원(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어 지금도 성균관과 전국 향교의 대성전에 모셔져 전국 유림의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전국 곳곳에 수많은 사당과 서원이 세워졌다.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각지의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향교의 변천이 이어졌는데 전국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에 보통 1개의 향교가 있는데 비하여 화순군에는 1392년(태조 1) 능주향교(綾州鄕校), 1433년(세종 15) 화순향교(和順鄕校), 1445년(세종 27) 동복향교(同福鄕校) 등 3개의 향교가 세워져 지금까지 면면히 유교문화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너무 뜨겁고 무더운 날씨 속에서 개미산전망대 까페를 찾아 열기를 식힌 회원들은 연둔리 숲정이 관람과 한옥 숙소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인 7월26일 일요일을 맞이하여 ‘보고 싶어도 함부로 볼 수 없는 신비의 장소’로 알려진 화순적벽으로 향했다.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보산리, 장항리 일대 7km에 걸쳐 있는 붉은 절벽인 노루목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 물염적벽을 통칭하여 부르는 이름인 화순적벽(和順赤壁)의 기원은 앞서 언급했던 기묘사화로 인해 화순 동복의 나복산(蘿葍山) 아래로 유배를 온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1483-1536) 선생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보고,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하여 최초로 적벽(赤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 등의 유명 인사들이 방문했던 사실들이 확인되는 가운데 지난 1970,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나룻배가 다니고 여러 마을에서 사람들이 정답게 살아갔으나 1971년에 동복댐이 건설되고, 1985년에 대폭 증축되며 16개 마을이 물에 잠기고 광주광역시와 화순군에 거주하는 인구를 위한 상수원보호구역으로도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도 전면금지되었다가 2014년 9월부터 화순군청에 미리 신청하고 승인받은 경우에 한하여 일부 출입만 허용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방문하면 절대 도보나 차량 통행을 할 수 없는 곳이고, 간혹 특별한 행사 등에서만 미리 협의되고 동의된 경우에 한하여 매우 제한적으로 개방되고 있는 숨은 명소이다.
원래는 더 많은 유적지와 명승지를 찾고 싶었으나 화순 지역민들도 전망 좋고, 에어컨 시설이 괜찮은 대형 카페에서 더위를 피하는 상황이었으니 외지에서, 난생 처음으로 방문한 회원들에게는 이 정도의 프로그램만으로도 화순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새롭게 하고, 날씨가 괜찮을 봄이나 가을에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목적지를 이동할 때에 사용한 네비게이션은 고속도로와 큰 도로를 중심으로 안내했으나 지역 사정을 잘 아는 회원의 인도로 따라간 숲속 도로는 “호남 지역에 이런 길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파른 경사, 우거진 나무 군락, 곳곳에 자리 잡은 예쁜 카페 등이 과객(過客)의 눈길을 유혹했다.
구불구불함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하여 처음 운전을 배우는 초보 운전자는 물론이고, 복잡하고 꽉 메인 일상에서 벗어나 창문을 열고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답답한 머리와 마음의 짐을 풀고 싶은 이들에게도 “여기서는 좀 늦게, 좀 부드럽게, 좀 즐기면서 달려야 한다”는 단순한 명제를 제시했던 이틀간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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